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천보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사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가 1936년 말 광복회 조직의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 거짓으로 평가받는다. '조국광복회'는 실존하였지만 전광 등이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0_0040_0020_0030_0030|#]]] [[김일성]]이 장백현에 6사 조직과장 권영벽을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한 것은 같은 해 9월이었다. 갑산군에서는 1935년부터 공작이 시작되었는데 이 지역의 적색농업조합 활동에 참여하던 [[박달]]은 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달과 김일성의 연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강덕상/미촌수수 편 "현대사 자료" 30권 283쪽] 한편 김일성은 권영벽과 장증렬 등 요지로 파견한 공작원들로 하여금 중공 동만특위 장백현 정치공작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는데 권영벽이 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공작위원회와 당세포, 생산유격대 조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1권, 독립기념관, 275p.(5장 3절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의 활약 -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 1937년 3월에 열린 장백현 서강양목정자회의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제4사와 6사·2사가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한 이 진공작전에서 유일한 한인 단위부대장으로서 장백근거지를 건설한 [[김일성]]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북항일연군 6사는 장백현 쪽에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을 공격하고 나중에 2·4·6사는 [[백두산]] 서남쪽의 간삼봉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진출하여 일경의 주재소를 파괴한 제4사의 활동은 ‘최현’의 활약으로 알려져 [[최현(북한)|최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다.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